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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시론] 균형발전과 성장 양립 어렵다 (2005-05-31)

관리자l2020-09-14l 조회수 420


  신행정수도의 아류성(亞流性) 국책사업인 행정중심복합도시(행복도시)는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현 정부의 핵심 사업이다. 문제는 저성장형 선진국형 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지 않는 한, 국가적 수준에서의 총량적 성장이 지역의 균형발전과 등치될 수 있다는 논리는 전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미 존재하는 수도에서의 기능 이전을 통한 신도시 건설이 국가의 균형발전은 물론 총량적 성장의 초석이라는 주장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전형이다.
  계층 간·지역 간 균형발전의 규범에 대한 되새김은 시·공간을 불문하고 새겨야할 치자(治者)의 덕목이다. 하지만 정책으로서의 균형발전은 우리나라와 같은 성장지향형 국가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의 총량적 성장과 지역발전은 불균형개발이라는 시책이 가장 유효하다는 것이 산업화 시대 이후 전 세계 선진국의 개발경험에서 확립된 보편적 이론이다. 가장 큰 문제는 개발독재 시절에는 “하면 된다”는 독재적 신념이나마 있었지만, 지금의 행복도시는 “하고 보자”라는 무책임한 정치적 공약의 잔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약이 무효인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해소를 위해서 내린 ‘극약 처방’이라는 것이 현재 행복도시 건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변이다. 백년대계인 국토계획을 특정 시점에서 극약처방해야 한다는 진단도 문제지만, 균형발전의 핵심이라는 행복도시는 계획의 원론에 제시되어 있는 ‘다양한 대안에 대한 최적의 선택’이 아니었음은 명약관화다. 즉 이미 선택된 충청권 입지라는 불변의 대안에 대한 합리성의 덧씌움만 존재하는 것이 행복도시다. 이러한 견강부회적 논리의 연원이 2002년 대선에서 급조된 정치 공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정치적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행복도시에 대한 논쟁은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신행정수도가 균형발전을 이루기 위한 적자(嫡子)인지에 대한 논란은 국민의 여론과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통해 이미 서자(庶子)임이 드러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생아 격인 행복도시를 다시 적자로 인정해달라는 현 정권의 간청은 후안무치한 일이다. 무리한 간청을 통해 사생아를 적자로 등록하려 애써도 뺨이나 맞는 여당은 애처롭기만 하다. 행복도시가 적자인지, 서자인지, 아니면 사생아인지도 분별 못하는 야당도 혼란만 가중하고 있다.
  행복도시가 침체기에 있는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거시정책으로서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이미 존재하는 수도권 기능의 분산을 계획의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적 효과를 차감함으로 인한 마이너스섬(minus-sum)과 같은 국가경쟁력 약화가 우려되는 것이 현실이다. 안 그래도 기업도시에는 희망하는 기업이 없고, 혁신도시에는 혁신의 주체가 실종되었으며, 공공기관 이전은 정권이 바뀌면 가능하겠는가라는 회의적 시각이 범람하고 있다. 행복도시에 투자될 수십조원을 차라리 기업도시와 같은 자생력 있는 지역별 거점도시 육성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지 않을까.
  정책추진에 따른 비판이 자칫 복지부동(伏地不動)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매도될까 두렵다. 하지만 “정책추진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해당 공무원의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정치권에도 유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책임의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행복도시가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최적의 대안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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