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계획가는 무엇을 하는 직업인가? 전통적인 도시계획가의 윤리적 가치는 도시 및 지역계획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정치인을 비롯한 정책결정권자들에게 가치중립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도시계획 교과서는 가치중립적 대안 제시는 물론, 정책결정자들에 대한 설득 및 대화를 통해 바람직한 계획의 구상이 실현가능 하도록 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신행정수도건설과 관련된 다음의 두 가지 사례들은 우리나라 도시계획가의 양식에 의구심을 던지고 있다.
작년 10월 24일에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가 주관하고 ‘신행정수도연구단’이 주최한 ‘신행정수도 개발방향 국제세미나’가 있었다. 이 국제세미나의 주요 목적은 국토계획을 전공하는 외국의 저명 학자들을 초빙하여 신행정수도 이전의 타당성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이 세미나에 초빙된 외국 학자 중의 한 분이 현재 미국 남가주대학교(USC)에 재직하고 있는 리차드슨(H. W. Richardson)교수다. 리차드슨교수는 도시계획 및 지역경제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들 중 한 분으로 인정받는 석학이며, 1970년대부터 한국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해 온 바 있다.
리차드슨교수의 논문을 요약하면 다음의 4가지다. 첫째, 한국적 특수 상황에서 통일 이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정부의 계획은 미래지향적인 국토계획의 특성을 무시한 단견이라는 것이다. 둘째, 시간적인 비현실성이다. 착공시기로 예정된 2007년은 현 정권의 임기말기이고 한국적 현실에서 현재 대통령의 임기 중 실행되지 않는 계획은 차기 정권에서 실현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궁극적 국가발전은 불균형발전이 더욱 효율적이기에 지역간 균형발전을 위한 수도이전이라는 대의명분에는 “더욱 동의하기 힘들다”라는 것이다. 특히 21세기는 서울과 같은 집적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도시의 성장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민주화와 유교적 사고방식이 상존하고 있는 한국은 좋은 측면도 있지만 대통령의 선거공약을 법과 동일시하는 무비판적 수용자세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는 있으나 선거 당시의 공약을 제도적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내용은 전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신행정수도의 당위성을 적극 홍보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지만 초청자의 의도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논문은 언론에 철저히 함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사례는 제4차 국토종합개발계획(2000-2020)의 주요 골격수정이다. 제4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약 20년의 기간을 설정한 장기계획이다.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동북아거점국가 건설, 국토균형발전 그리고 통일 이후의 국토발전에 대한 청사진이 원래 계획이었다.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은 이러한 골격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고 있고 현재 대대적인 수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가치중립적 위치에서 수립된 국가의 장기계획이 채 시행되지도 못하고 정치적 논리로 수정된다는 측면에서 큰 문제다. 절차적 측면의 도시계획에는 계획 시행상 문제가 있을 경우 귀환(feedback)하는 절차를 두고 있다. 하지만 시행하기도 전에 계획골격이 수정되는 것은 정상적인 도시계획의 절차적 측면과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행정수도의 이전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다수의 전문가는 도시계획가들이다. 선거 당시 급조된 공약으로 인해 국가발전의 기간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선진정치개혁 중의 하나라면, 정치인의 급조된 공약으로 인해 바람직한 국토의 공간계획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선진화된 도시계획가의 책무가 아닐까? 제4차국토개발계획에서 애초 계획되지 않았던 수도이전이 실현될 경우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도시계획가의 잔영이 역사 속에 투영되지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