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위치했음에도 마르크스(K H Marx)를 언급하지 않고 20세기 자본주의의 정치·경제 및 역사를 거론할 수 없다는 역설이 있다. 서구자본주의 국가체제를 노동자계급의 제도적 노예화를 통해 자본계급의 이익실현을 위한 공적도구로 인식한 틀은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서술한 자본순환론(circuit of capital)으로 극명하게 표출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의 순환은 자본가의 궁극적 이해관계, 즉 노동자계층에 대한 잉여 노동력의 착취를 실현하기 위한 구조로 설명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정부의 역할을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도구로 설명하는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탐욕에서 비롯된 과잉 축적이 자본주의 체제 몰락의 서막이라고 예언했다.
1990년 옛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몰락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의 종언'이 대변하듯이 자유주의 체제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이상적 공산주의에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비쳐졌다. 하지만 인류사에 유례가 없었던 미국의 번영에 기반한 이 같은 자신감은 최근 '월가를 접수하라'는 시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우리의 땅' 미국이 아닌 1%의 소수 자본가들을 위한 '그들의 땅'으로 대표되는 미국인들의 반발은 죽은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종언'의 서막을 보는 듯하다.
비록 케인스식 수정자본주의의 적용을 통해 간헐적인 정책적 변화를 보여왔으나 20세기 이래 미국은 개인의 사유재산권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기업엔 정부 간섭이 거의 없으며 돈 번 사람은 시기를 받지 않는 신자유주의경제학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의 표본이었다. 특히 국가적으로는 인류사에 이 같은 독점적 초강대국의 발현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린 지난 1세기였다. 하지만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노(老)교수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국사회의 변화들 중 특히 가진 자에 대한 분노는 '정말 유례 없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이 경험했던 세계사에 유례 없던 고속 성장기의 공통점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일반 시민과 의식의 궤를 공유하던, 즉 평범한 사람들이 잘살 수 있도록 해야 자본가들의 부도 증가한다고 믿는 의식이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의식은 특히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전 세계적 위기가 있었던 70년대 초와 80년대 말의 위기 극복에 대한 단초였다. 하지만 세계화에 따른 시장의 확대와 산업의 재편은 성장이 분배를 촉진하던 체제에서 성장이 계층간 격차를 확대시키는 체제로 변화됐고 자본가들의 의식도 '모두가 함께'라는 사회의 기풍에서 '가질 수 있을 때 챙겨라'로 변질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미국의 하버드, 예일, 펜실베이니아 등과 같은 주요 대학 졸업생의 약 60% 이상이 기초과학과 공학 분야로 진출해 이들의 성취가 국가 전체의 경제적 부를 제고해 다수의 평범한 사람에 대한 안정적 삶을 보장하는 보루로 기능했다. 하지만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이들 대학 졸업생의 75%가 개인적 부의 축적을 위한 투자전문가로 진로를 설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바람직한 미국식 자본주의체제의 운용방향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 등과 같은 극소수의 자본가계층이 존재하지만 미국식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통섭의 묘를 살려 컴퓨터의사로 전직해 우리 사회 극소수의 자본가로 변신한 서울대 안철수 교수의 최근 행동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시절 미국 자본가들의 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안철수연구소의 우리 사회에 대한 기여는 말할 것도 없이 현재 가치로 약 2500억에 달하는 자신의 주식을 사회적 안전망 구축을 위해 기증한 안철수교수의 결정이 쉬운 일이었을까. 정치적 의미를 담아 폄훼하는 것은 쉬운 일이겠지만 그의 결정이 우리 사회가 유지해야할 자본주의 체제의 버팀목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안철수 교수처럼 양식 있는 자본가가 활동의 지평을 넓혀 국가 독점 자본주의에 의한 폐해를 제거하길 원하는 것이 최근 국민이 그에게 보내는 전폭적 지지의 이유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