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22년부터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유명한 진(秦)의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를 중국의 극한적 이념적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라 부른다. 중국 역사상 이 시기만큼 생각이 서로 다른 학파와 사상가들이 생겨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논쟁을 벌인 사례가 없었는데 춘추전국시대 발현한 이들 학파와 사상가들은 제자백가(諸子百家)로 통칭된다. 현존하는 중국의 최고서인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에는 제자략(諸子略)이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 189가(家)와 4000편이 넘는 책이 기록돼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엄청난 학파와 사상가들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우리에게 익숙한 학파로는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 영화 '묵공'으로 유명한 묵가, 노장사상으로 유명한 도가, 한비자로 기억되는 법가, 손자병법의 병가 등이다.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인 기원전 4세기께 도가 사상가 중 일원인 어구(禦寇)라는 이름을 가진 열자(列子)는 노자, 장자와 함께 3대 도가로 알려져 있다. 8권 8편으로 이루어진 열자는 공맹사상과 같이 관념적 교훈이 중심이었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방대한 양의 우화를 기초로 서술돼 있어 가장 인기 있는 애독서의 하나로 꼽힌다. 열자의 저술 중 부의 축적 방식과 관련한 현대적 교훈은 부자인 제(齊)나라 국(國)씨와 가난한 송(宋)나라 향(向)씨에 대한 은유에서 찾을 수 있다.
향씨가 국씨에게 부자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국씨는 자기가 부자가 되는 비결은 '교묘하게' 도둑질을 잘한데 연유한다고 말한다. 도둑질로 부자가 되었다는 액면의 말만을 믿은 향씨는 닥치는 대로 도둑질을 하다 체포돼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까지 다 뺏기고 국씨에게 다시 찾아와 속았다며 원망을 늘어놓는다. 이에 향씨는 자신이 실행한 '교묘한' 도둑질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하늘에 있는 천시(天時)와 땅의 지리(地理)를 훔쳐 비와 이슬의 축임과 산과 못의 물건들을 훔쳐다가 농사를 짓고 곡식을 기르며…뭍에서는 새와 짐승을 훔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를 훔쳐다가 먹는 재료를 만들고…곡식이든, 흙과 나무이든, 새와 물고기든 모두가 하늘이 만들어 낸 것이고 내가 가진 것은 아니었고…하늘이 만든 것은 훔쳐 와도 재난을 당하지는 않는 법이오. 그런데 금은보화 따위는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당신은 그걸 훔치고 죄를 받은 것이니 남을 원망할 수도 없게 되었소."(제자백가·김영수 역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소위 정권 실세들의 금전적 전횡은 천지(天地)의 이치에 어긋난 방향으로 도둑질을 일삼다 패가망신한 송나라의 향씨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전 청와대 홍보수석과 전 문화체육부차관에 대한 금품수수혐의는 지난 수십년간 흔히 경험했던 정권 말기적 현상의 단초가 아닐까하는 우려가 많다. 이번 정권만은 아니길 바랐던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근 SLS그룹 회장이 추가적 금품수수 대상으로 언급하는 인사들이 현 정권의 실세로 국가의 중요한 요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 그 실망감은 배가된다.
열자는 도둑을 없애는 방안에 대한 교훈도 제시한다. 도둑이 많아 고민하던 진(晉)나라의 임금은 얼굴과 눈치만 보고도 도둑을 판단하는 극옹(隙擁)이라는 사람을 중용해 큰 성과를 거둔다. 임금은 이를 노자의 제자인 조문자(趙文子)에게 자랑했더니 조문자는 현명한 치자(治者)로서 취해야 할 바람직한 방안이 아니라 조언한다. 도둑들이 의결해 극옹을 살해하자 도둑 퇴치의 유일 방안을 잃은 임금은 조문자에게 다시 자문한다.
이에 조문자는 도둑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진 사람을 등용해 정치를 맡게끔 하고 교화가 위로부터 아래로 미치도록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조언한다. 임금이 수회(隋會)라는 현자를 중용해 국사를 맡기자 도둑들은 모두 이웃나라로 도망하였다.
임기가 1년 반 남짓 남은 현 정권에서 수회와 같은 어진 인재의 등용을 통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일까. 차기 대권의 큰 뜻을 품은 여야의 잠룡들이나마 새겨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