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태조가 집권한 1392년부터 1910년 제27대 순종까지 약 519년을 이어 온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현군을 거론하라면 한글창제 및 과학창달 등과 같은 실용주의적 정치를 통해 백성의 안위를 보살핀 제4대 세종대왕이 가장 적합하다는데 이론이 없어 보인다. 강력한 왕권정치를 지향해 온 조선시대 통치철학의 기본인 백성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라는 민본의 정치이념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를 확립한 것도 세종이라 할 수 있다.
전 왕조를 걸쳐 바람 잘 날 없던 조선시대였지만 세종시대가 상대적으로 국내외 정세가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면 세종과 비견되는 업적으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룩한 것으로 칭송받는 영조와 정조 시절은 국내외적 격변기에 놓여 있던 시기였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로 이어진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환은 조선 중기의 경제기반을 심각하게 황폐화시켰으며 영조시대 노론과 소론의 내환으로 비견되는 국내 정치의 혼란은 자식인 사도세자의 참극을 야기할 만큼 극단으로 치달았다. 정조가 재위에 있던 18세기 후반은 미국의 탄생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청나라 최대 융성기의 전개 등 국제 정세 역시 격변하던 시기였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영·정조시대의 기반을 확립한 영조는 특히 절약과 검소를 솔선하는 애민군주(愛民君主)로 후세 사가들에 의해 평가받는다. 영조행장을 보면 영조의 재위 20년 되던 해인 1744년 왕의 문후를 여쭙던 신하들이 영조의 침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영조가 '중의(中衣), 철릭(天翼) 따위는 이따금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고 기록돼 서민의 애환을 이해하는 군주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평가받는 영조의 업적은 개인의 검소함이 아닌 민본정치에 기반한 사회체제의 개혁에 있었다. 영조는 국가적 행사에서의 사치방지, 청계천 준설 공사, 금주령 실시, 사상정책 및 인재등용에 있어서의 탕평책 도입, 균역법의 실시를 통한 백성들의 세부담 감소 그리고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동국여지승람'을 계승한 '속대전' '속오례의' '대종여지도' 편찬과 같은 민족문화의 재건 등과 같이 주요 사회체제에 대한 개혁정책의 실행이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영조시대 확립된 민본정치의 기반 위에 즉위한 정조는 실질적인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룩한 군주로 평가된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해 인재등용의 공평성을 지향하고 외규장각을 설립해 왕실의 기록을 보다 체계적으로 확립하도록 했다. 다른 한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해 수백년 동안 기득권을 갖고 이득을 취하던 시전상인들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하는 대신 그 이익이 다수 사상(私商)과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또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정조의 민본 정치사상 실천을 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낙후지역인 호남을 배려해 이 지역의 상징인 김인후에 대한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시행하는 등 포용정책을 실시하였다.
아직 2년여 남은 MB정부의 역사적 공과를 현 시점에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논하면서 현 정권이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에 못지 않은 치적을 쌓은 정권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국민이 가지는 한결 같은 소망이리라 믿는다. 미증유의 어려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이룩한 경제 실적, 4대강 치수사업, 초과이익 공유제 등과 같은 상생 정책을 통한 독점적 이익 분배,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 등 영·정조 시대와 유사한 상황들은 이러한 바람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폐쇄적인 인사 정책, 포용성 없는 지역 정책, 친서민적이지 못한 조세정책, 성장의 편익을 향유하지 못하는 계층의 증가 등은 영·정조 시대 민본정치의 원칙하에 사회체제 개혁을 통해 이룩했던 주요 업적과는 유리되는 것이다. 여당의 4·27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언론을 통해 나타난 청와대발 일성은 국민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었다. 곧 이루어질 새로운 진용 정비를 통해 영·정조 시대의 기반이었던 민본정치의 진가가 MB정부의 의지로 승화되길 기대한다.